1964년 7월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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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4년 7월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는 이케다 하야토의 3선 도전에 사토 에이사쿠와 후지야마 아이이치로가 맞서면서 치러졌다. 이케다는 1차 투표에서 과반수를 얻어 승리했지만, 언론의 편파 보도와 각 진영의 전략, 내부 갈등 등 치열한 선거전이 펼쳐졌다. 이케다는 건강 문제로 총리직에서 물러났고, 사토 에이사쿠가 후임 총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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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7월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 |
---|---|
선거 개요 | |
선거 이름 | 1964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
선거 유형 | 총재 선거 |
진행 여부 | 아니오 |
이전 선거 | 1962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
이전 선거 연도 | 1962년 |
다음 선거 | 이케다 재정 |
다음 선거 연도 | 1964년 12월 |
선거 날짜 | 1964년 7월 10일 |
투표 정보 | |
선거 제도 | 결선 투표제 |
유권자 수 | 당 소속 중의원 의원: (불명) |
후보 정보 | |
![]() | |
후보 1 | 이케다 하야토 |
득표수 | 242 |
![]() | |
후보 2 | 사토 에이사쿠 |
득표수 | 160 |
![]() | |
후보 3 |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
득표수 | 72 |
![]() | |
후보 4 | 나다오 히로키치 |
득표수 | 1 |
직책 정보 | |
직책 | 총재 |
선거 전 총재 | 이케다 하야토 |
선거 후 총재 | 이케다 하야토 |
2. 배경
1964년 이케다 하야토 총재의 임기 만료를 맞아 분쿄 공회당에서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가 열렸다. 이케다 하야토(이케다 파)가 3선을 노리는 가운데, 이케다의 정권 운영에 비판적이었던 사토 에이사쿠(사토 파), 후지야마 아이이치로(후지야마 파)가 출마하여 경쟁했다.[1]
선거 전, 사토에게 정권을 넘기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이케다는 이를 거부했다. 이로써 "요시다 학교"의 우등생으로 불리던 이케다와 사토의 직접 대결이 이루어졌다.[1]
현직 총재였던 이케다는 1차 투표에서 과반수를 획득하여 당내 안정을 꾀하려 했다. 반면 사토는 후지야마 파와 연합하여 결선 투표로 끌고 가려는 전략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유례없이 많은 "'''실탄'''"이 오갔다고 전해지며, 다음과 같은 은어까지 등장했다.[1]
- "생일반(生一本)": 소속 파벌의 의향을 따르는 것
- "니카(ニッカ)": 두 파벌에서 돈을 받는 것
- "산토리(サントリー)": 세 파벌에서 돈을 받는 것
- "올드 퍼(オールドパー)": 여러 파벌에서 돈을 받아 누구에게 투표했는지 불분명한 것
이케다 파와 사토 파라는 보수 본류 간의 싸움에서 당인파의 지지를 얻은 이케다가 신승했지만, 이는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는 접전이었다. 사토 진영은 파벌을 넘어 지지를 호소했고, 오노 파, 고노 파, 미키 파 등 당인파 중에서도 사토 지지자가 적지 않았다.[2] 하지만 언론은 이케다 우세 보도를 지속했고, 투표 전날 아사히 신문은 "이케다 압승"을 보도하여 사토 진영은 "신문에 당했다"고 분개했다.[3]
후쿠다 다케오는 사토 진영의 패인으로 정세 보도, 사토 파와 후지야마 파의 조정 부족, 이시이 파의 통일성 부족을 꼽았다.[4] 다나카 가쿠에이는 사토 파였지만 이케다와 친분이 있어 이케다를 도왔다. 사토 파 간부 중 이케다와 말이 통하는 사람은 다나카뿐이었고, 이케다와 사토를 잇는 사람은 요시다 시게루를 제외하면 다나카밖에 없었다. 다나카는 사토 파 사무실에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사토는 다나카의 미묘한 입장을 알고 "다나카의 일은 건드리지 마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오노 반보쿠와 와타나베 쓰네오의 움직임도 있었다. 이케다에게 오노 파의 지지는 결정적이었지만,[5] 총재 선거를 앞두고 오노가 뇌일혈로 쓰러져 사망하면서(5월 29일) 이케다에게는 타격으로 보도되었다.[6] 와타나베는 병상의 오노에게 이케다 지지를 설득했고, 오노 파 내 이케다 지지 분위기를 조성하여 오노 파 40명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2. 1. 이케다 하야토의 3선 도전과 경쟁 구도
이케다 하야토는 총재 임기 만료가 다가오자 3선을 노렸고, 이케다의 국정 운영에 비판적이던 사토 에이사쿠와 후지야마 아이이치로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출마하면서 3파전으로 진행됐다. 주산회(사토파) 측에선 이케다의 3선을 막고 사토에게 정권을 이양할 것을 요구하는 공작이 진행되었지만, 이케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로써 나란히 요시다 학교의 우등생 출신이던 이케다와 사토의 직접 대결이 불가피해졌다.[10]이케다는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를 하여 결선 투표를 무산시켜 당내에서의 입지를 안정시키고자 했으며, 반대로 사토와 후지야마는 2·3위 연합을 결성해 어떻게든 결선 투표까지 끌고 가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유례없는 격렬한 선거전이 예상되었고 어느 진영이든 자금을 끌어모으는 데 혈안이 되었다.
입후보 제도는 아니었지만, 선거 활동을 한 국회의원은 다음과 같다.
이케다 하야토 | 사토 에이사쿠 |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
---|---|---|
![]() | -- | -- |
중의원 의원 (6선·히로시마 2구) 내각총리대신 자유민주당 총재 | 중의원 의원 (7선·야마구치 2구)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 중의원 의원 (3선·가나가와 1구) 외무대신 당 총무회장 |
굉지회 (이케다파) | 주산회 (사토파) | 애정회 (후지야마파) |
히로시마현 | 야마구치현 | 도쿄 |
2. 2. 치열한 선거전
현직 총재였던 이케다 하야토는 1차 투표에서 과반수를 얻어 당내 입지를 안정시키려 했다. 한편, 사토 에이사쿠는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파와 연대하여 2, 3위 연합을 결성, 결선 투표까지 선거전을 끌고 가려는 전략을 세웠다.[1]각 후보 진영은 자금 확보에 사활을 걸었고, 유례없는 "'''실탄'''"이 오가는 치열한 선거전이 벌어졌다.[1]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듯, 다음과 같은 은어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 "생일반(生一本)": 소속된 파벌의 의향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 "니카(ニッカ)": 두 파벌에서 돈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 "산토리(サントリー)": 세 파벌에서 돈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 "올드 퍼(オールドパー)": 여러 파벌에서 돈을 받아 결국 누구에게 투표했는지 불분명한 것을 의미한다.
3. 과정
1964년 총재 선거는 이케다 하야토 총재의 임기 만료가 다가오면서 시작되었다. 이케다는 3선을 노렸고, 이케다의 국정 운영에 비판적이었던 사토 에이사쿠와 후지야마 아이이치로가 출마하여 3파전이 되었다. 주산회(사토파)는 이케다의 3선을 막고 사토에게 정권을 이양할 것을 요구했지만, 이케다는 이를 거부했다. 이로써 요시다 학교 출신의 이케다와 사토 간의 직접 대결이 불가피해졌다.[10]
이케다는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를 통해 결선 투표를 무산시키고 당내 입지를 안정시키려 했다. 반면 사토와 후지야마는 2·3위 연합을 결성하여 결선 투표까지 끌고 가려 했다. 이로 인해 유례없이 격렬한 선거전이 예상되었고, 각 진영은 자금 확보에 열을 올렸다. 당시에는 다음과 같은 은어까지 등장했을 정도였다.
- "생일반(生一本)": 소속된 파벌의 의향을 따르는 것
- "니카(ニッカ)": 두 파벌에서 돈을 받는 것
- "산토리(サントリー)": 세 파벌에서 돈을 받는 것
- "올드 퍼(オールドパー)": 여러 파벌에서 돈을 받아 누구에게 투표했는지 불분명한 것
결과적으로 굉지회(이케다파)와 주산회 (보수본류) 간의 대결에서 당인파의 지지를 받은 이케다가 승리했지만, 예상 밖의 접전이 펼쳐졌다.
3. 1. 각 진영의 전략과 내부 갈등
사토 에이사쿠는 파벌의 틀을 벗어난 지지를 호소했고, 춘추회(고노파)·정책연구회(미키파) 등 전반적으로 이케다 하야토를 지지하던 당인파 그룹에서 사토를 지지하는 수가 결코 적지 않았다.[11] 다만 언론들은 이케다가 우세하다는 보도를 지속적으로 내보냈고 『아사히 신문』은 투표일 전날에 이케다 압승을 보도하기까지 했다. 이에 영향을 받은 의원들이 적지 않아 사토 캠프에서는 "신문한테 당했다"라고 분을 삭이지 못했다.[12]주산회(사토파)의 후쿠다 다케오는 언론들의 보도 외에도 주산회와 애정회(후지야마파)의 조정이 부족했고 수요회(이시이파)가 통일된 모습을 보이지 못한 점도 패인으로 꼽았다. 애정회 내에서는 사토 지지뿐 아니라 이케다 지지에 대한 목소리도 컸는데 후지야마 아이이치로가 사토와의 연합에 적극적이지 않았으며 수요회 역시 사토 지지로 통일되지 않아 이케다와 사토로 표가 갈렸던 것이다.[13]
3. 2. 다나카 가쿠에이의 역할
다나카 가쿠에이는 주산회(사토 파) 소속이었지만, 이케다 하야토와 친분이 있어 이케다를 도왔다.[10] 사토 파 간부 중에서 이케다와 대화가 가능했던 유일한 인물이었고, 정계에서 은퇴한 요시다 시게루를 제외하면 당시 이케다와 사토 두 사람 사이를 중재할 수 있는 유일한 의원이었다.[10]총재 선거 기간 동안 다나카는 주산회 사무실에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한 번 방문했을 때도 인사만 하고 돌아갔다.[10] 사토는 다나카의 입장을 이해하고 파벌 간부들에게 "다나카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한다.[10] 만약 다나카가 적극적으로 사토를 지원했다면 사토가 승리했을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다.[10]
3. 3. 오노 반보쿠와 와타나베 쓰네오의 역할
오노 반보쿠는 이케다 하야토와 친했고 사토 에이사쿠는 싫어했지만, 총재 선거를 앞두고 뇌출혈로 쓰러져 선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15] 하지만 오노 파(목정회) 내부에서는 이케다와 사토 중 누구를 지지할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이때, 와타나베 쓰네오는 이케다 지지 입장에서 병상에 누워 있던 오노를 찾아가 설득했다. 와타나베는 "당신은 사토에겐 속은 적이 있지만 이케다에겐 그런 적이 없다. 이번에도 이케다를 지지해야 한다"라고 말했지만, 몸 상태가 좋지 않던 오노는 대답하지 못했다.
와타나베는 오노가 권력을 유지하려면 건강하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비서들과 함께 면회를 막은 뒤, 오노가 매일 하이쿠를 짓고 있다며 기자회견에서 발표했다(발표된 하이쿠는 오노의 비서가 지은 것이었다). 그리고 오노의 사무소에 가서 "오노 씨는 이케다 지지를 정했다"라고 알렸다. 그러자 간부인 후나다 나카·하라 겐자부로가 "오노 선생님의 의향이 정해졌다"라고 외치며 목정회 의원 40명이 이케다 지지를 굳혔다.
와타나베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이케다의 총애를 받았고, 오노 파의 창구 역할을 하며 이케다와 직접 각료 인사에 관한 교섭도 했다.[16]
4. 후보자
입후보제가 아니었기에 선거 활동을 한 의원들을 모두 표시했다.
이케다 하야토 | 사토 에이사쿠 |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
---|---|---|
-- | -- | |
중의원 의원(6선, 히로시마현 제2구) 내각총리대신 자유민주당 총재 | 중의원 의원(7선, 야마구치현 제2구)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 정무조사회장 | 중의원 의원(3선, 가나가와현 제1구) 외무대신 총무회장 |
굉지회(이케다파) | 주산회(사토파) | 애정회(후지야마파) |
히로시마현 | 야마구치현 | 도쿄부 |
5. 결과
이케다 하야토는 과반수를 불과 4표 넘는 득표수로 3선에 성공했다. 마쓰무라 겐조는 이를 두고 "한 송이가 피어도 꽃은 꽃"이라고 평가했지만, 이케다의 비서관 이토 마사야는 '씁쓸한 승리'라고 표현했다. 이케다는 사토 에이사쿠와 후지야마 아이이치로의 득표수를 합친 것보다 40표 이상 앞설 것으로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10표 차이에 그쳐 충격을 받았다.[17] 사토는 후지야마 파와의 연합을 통해 결선 투표에서 역전을 노렸으나, 1차 투표에서 패배하여 크게 낙담했다.
당시 자민당 총재 선거는 입후보제가 도입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자민당 소속 의원에 대한 투표는 모두 유효표로 처리되었다.
후보자 | 득표수 | 득표율 |
---|---|---|
이케다 하야토 | 242 | 50.95% |
사토 에이사쿠 | 160 | 33.68% |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 72 | 15.16% |
나다오 히로키치 | 1 | 0.21% |
합계 | 475표 | 100% |
유효 투표수 | 475표 | |
무효표·백표 | ||
유권자 수 | 100% |
6. 이후
1964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는 3선에 도전하는 이케다 하야토와 이에 맞서는 사토 에이사쿠,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간의 치열한 경쟁으로, 유례없는 "실탄"이 오가는 격전이었다. 이 과정에서 "생일반(生一本)", "니카(ニッカ)", "산토리(サントリー)", "올드 퍼(オールドパー)"와 같은 은어가 등장하기도 했다.[1]
결과는 당인파의 지지를 얻은 이케다의 신승이었지만, 이는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는 접전이었다. 사토 진영은 파벌을 넘어 지지를 호소했고, 언론은 이케다의 우세를 보도했다. 사토 진영은 언론 보도가 "승산이 있는 쪽에 붙는" 의원 심리에 영향을 미쳤다고 분개했다.[3] 후쿠다 다케오는 사토 진영의 패인으로 정세 보도, 사토 파와 후지야마 파의 조정 부족, 이시이 파의 통일 불충분을 꼽았다.[4]
다나카 가쿠에이는 사토 에이사쿠 파였지만 이케다 하야토와도 친분이 있어 이케다를 지원했다. 이케다와 사토 사이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 사람은 요시다 시게루를 제외하면 다나카가 유일했다.[4] 오노 반보쿠의 뇌일혈 사망은 이케다에게 큰 타격으로 여겨졌지만, 와타나베 쓰네오는 오노 파를 이케다 지지로 돌아서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7]
6. 1. 이케다 하야토의 퇴진과 사토 에이사쿠 내각 출범
1964년 하계 올림픽 폐회식 다음 날인 1964년 10월 25일, 이케다 하야토 총리는 내각 총사퇴를 표명했다. 이케다는 세 번째 총재 임기를 시작했지만, 직후 후두암 진단을 받았다. 본인에게는 알리지 않았지만, 건강 문제로 국정 운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1]격렬한 총재 선거를 치른 지 불과 반 년도 채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당내에서는 이케다의 후임 총재를 선거로 선출하는 것을 피하려는 분위기가 강했다. 미키 다케오 간사장과 가와시마 쇼지로 부총재 등은 당내 의견을 종합하여, 이전 선거에서 2위를 기록한 사토 에이사쿠를 후계자로 결정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케다도 이를 받아들여 11월 9일 사토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이케다 재정이 이루어졌다.[1]
같은 날 사토는 국회에서 내각총리대신으로 선출되었고, 12월 1일에는 정식으로 자유민주당 총재 자리에 올랐다.[1]
다나카 가쿠에이는 선거 과정에서 사토를 배신했지만, 이케다가 병으로 쓰러진 뒤 사토가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이케다를 설득하는 데 노력하여 사토의 용서를 받을 수 있었다.[1]
6. 2. 다나카 가쿠에이의 역할 변화
다나카 가쿠에이는 1964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사토 에이사쿠 파벌 소속이었지만, 이케다 하야토와도 친분이 있어 이케다를 지원했다.[4] 이 때문에 선거 과정에서 사토를 배신한 셈이 되었다.[4]하지만 이케다가 후두암으로 쓰러진 뒤, 다나카는 이케다의 병세와 심중을 가장 먼저 파악할 수 있었다.[4] 다나카는 이케다가 사토를 후계자로 지명할 것이라는 정보를 사토에게 전달하여, 이전 총재 선거에서의 빚을 갚았다.[4] 또한 이케다를 설득하여 사토를 후계자로 지명하도록 하는데 기여하여 사토의 용서를 받았다.
참조
[1]
웹사이트
佐藤長期政権を要職で支える 「いぶし銀の調整役」保利茂(6)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1-10-23
[2]
서적
正伝 佐藤栄作 上
新潮社
[3]
서적
山田前掲著
[4]
서적
評伝 福田赳夫
岩波書店
2021
[5]
뉴스
第112回 藤山愛一郎(その三)選挙資金調達で財産を使い果たす。だが、「いささかも悔いは残らない」
https://gendai.media[...]
[6]
서적
池田勇人とその時代
朝日文庫
1985
[7]
웹사이트
メディアと権力 「ルポライター 魚住昭」 - 東京土建一般労働組合
http://www.tokyo-dok[...]
[8]
논문
党首選出過程の民主化 : 自民党と民主党の比較検討
https://doi.org/10.7[...]
日本政治学会
2008
[9]
서적
戦後保守党史
岩波現代文庫
2006
[10]
웹인용
佐藤長期政権を要職で支える 「いぶし銀の調整役」保利茂(6)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24-06-19
[11]
서적
正伝 佐藤栄作 上
新潮社
[12]
서적
山田前掲著
[13]
서적
評伝 福田赳夫
岩波書店
202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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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112回 藤山愛一郎(その三)選挙資金調達で財産を使い果たす。だが、「いささかも悔いは残ら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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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서적
池田勇人とその時代
朝日文庫
1985
[16]
웹인용
メディアと権力 「ルポライター 魚住昭」 - 東京土建一般労働組合
http://www.tokyo-dok[...]
2024-06-19
[17]
서적
戦後保守党史
岩波現代文庫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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